헬스 갔다 와서 배고픈 상태로 국 끓이려고 마음먹은 게 문제였음. 원래 국 같은 거 잘 안 하는데 그날따라 단백질 좀 챙긴다고 소고기무국 하겠다고 나섬. 닭가슴살이나 구워 먹으면 편한데 그날은 왜인지 국이 당김. 냉장고에 무 반토막 남아있었고 소고기도 조금 있길래 계량 없이 걍 감으로 시작함. 인덕션이 1구짜리라 다른 거 하려면 순서를 지켜야 되는데 그것도 귀찮아서 냄비 하나에 다 때려 넣을 생각이었음.
물 양부터 눈대중. 국간장도 병째 들고 부어버림. 맛 한번 안 보고 계속 끓임. 헬스하고 와서 씻지도 않고 부엌에 서 있었던 것도 한몫함. 배고프면 판단력이 흐려짐. 단백질 챙긴다고 시작한 요리인데 정작 단백질 계산 같은 건 하나도 안 하고 그냥 소고기 눈에 보이는 만큼 썰어 넣었음. 헬스 갔다 온 날은 다 이런 식임. 계획은 거창한데 실행은 늘 대충.
한 이십 분쯤 끓였나. 국물 색깔은 그럴듯하게 나왔음. 맛을 봤는데 짠맛이 턱 끝까지 올라옴. 짜다는 말로는 부족함. 소금물에 무 넣고 끓인 수준. 물 더 부으면 되겠지 하고 부었는데 이번엔 밍밍하면서도 여전히 짬. 그 상태에서 소고기 몇 점 더 넣으면 나아질까 싶어서 그것도 해봤는데 오히려 국물만 탁해짐. 간이 한번 무너지면 물로 못 돌려놓는다는 걸 그날 배움.
무 건더기라도 건져 먹을까 하다가 그냥 다 버리기로 함. 냄비째 들고 싱크대로 가서 그냥 다 쏟아버림. 소고기 값이랑 무 값 생각하니까 아까웠는데 그거 먹고 속 버리는 것보다는 나음. 배달비 아까워서 해 먹은 건데 결국 재료값에 시간까지 날림. 계산이 안 맞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배달 시킬걸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늦은 후회임.
옛날 생각도 좀 났음. 학생 때 처음 자취방 들어가서 해 먹은 게 라면이 아니라 계란밥이었음. 밥에 계란 하나 깨서 간장 붓고 비빈 게 다였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음. 그때는 뭘 해도 다 맛있었던 것 같음. 요리 실력이 지금이랑 별 차이 없었는데 왜 그때는 실패라는 개념이 없었나 싶음. 아마 비교 대상이 없어서 그랬을 듯. 그때 자취방은 가스레인지도 없이 전기포트 하나로 버텼는데 그거에 비하면 지금 인덕션은 양반임.
국 하나로 냄비 두 개 쓴 날
버린 국 냄비 씻고, 계란 프라이라도 해 먹으려고 프라이팬 또 꺼냄. 원팬으로 끝내려던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감. 설거지거리 늘어나는 거 진짜 싫어하는데 그날은 냄비 두 개 다 닦아야 했음. 이럴 거면 처음부터 계란밥이나 해 먹을걸 싶었는데 이미 늦음. 계란 프라이 하나에 밥 비벼 먹으면서 방금 버린 국물 값을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했음.
국이라는 게 원래 간 보면서 조금씩 넣어야 되는 음식이라는 거 알고는 있었음. 아는 거랑 실천하는 거랑 다름. 급하면 걍 손이 먼저 나감. 국간장 병 뚜껑이 헐거웠던 것도 있음. 다음엔 계량스푼 좀 쓰자 싶다가도 귀찮아서 다음에도 안 쓸 것 같음 ㅋㅋ 헬스 끝나고 배고픈 상태로 부엌에 서는 것부터가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기도 함.
무는 아직 냉장고에 반의 반쯤 남아있음. 저건 또 어떻게 처리하나 싶은데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