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건너뛰기
혼밥로그
뒤로 가기

전자레인지 쿠지라이 라면

토요일 저녁에 헬스 갔다 와서 씻으려는데 화장실 배수구가 갑자기 막힘. 원룸이라 화장실이랑 주방이 거의 붙어있는 구조라 이런 거 하나 터지면 저녁 시간이 통째로 날아감. 뚫어뻥이 없어서 베이킹소다랑 식초 부어놓고 한참 기다렸다가 겨우 뚫음. 그거 치우고 손 씻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씀.

씻고 나오니 배는 고픈데 뭘 만들 기운은 없는 상태. 배달 앱 켰다가 배달비 보고 걍 끔. 요즘 배달비 아낀 돈 모았으면 PT 한 번은 더 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함. 냉장고 열어보니 지난주에 사둔 비엔나 소세지 남은 거랑 새송이버섯 반 토막, 달걀 몇 개가 눈에 띔. 저것들 처치곤란 되기 전에 오늘 다 써야겠다 싶었음.

전에 어디서 계란이랑 치즈 올린 라면 사진 본 적 있는데 그게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었음. 반숙 노른자에 치즈 올라간 거 보고 저건 언젠가 한 번 해봐야지 하고 넘겼던 건데 오늘이 그날이 된 셈. 냄비 쓰면 설거지거리 늘어나는 게 싫어서 계속 미뤄왔던 것도 있음.

그래서 오늘은 걍 전자레인지로 가기로 함. 귀찮음이 디폴트인 사람 기준으로 그릇 하나로 끝나는 조리법이면 웬만하면 다 좋아함.

계란치즈라면이 오늘 당첨된 이유

원래 이 조합을 시도해볼까 말까 몇 주 고민했었음. 인덕션 1구짜리 미니 주방이라 냄비 하나 올리면 다른 걸 동시에 못 함. 근데 전자레인지 조리법이면 그릇 하나만 쓰고 끝나니까 설거지 부담이 확 줄어듦. 그게 오늘 결심한 결정적 이유임.

재료도 마침 냉장고에 널려있던 것들이라 사러 나갈 필요도 없었음. 이런 날은 걍 하늘이 도운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함.

냉장고 파먹기로 재료는 다 해결함

  • 라면 1개
  • 물 300ml
  • 라면분말스프 0.6봉지
  • 라면야채스프 1봉지
  • 달걀 1개
  • 슬라이스치즈 1장
  • 비엔나소세지 120g
  • 새송이버섯 33g
  • 쪽파 5g

재료 목록 보면 알겠지만 죄다 자취생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것들임. 소세지랑 버섯은 반찬 만들다 남은 거 처리하는 거고, 쪽파도 대파 대신 조금 있던 거 씀. 새로 산 건 슬라이스 치즈 정도밖에 없었던 듯.

여담인데 오늘 재료 썰다가 오래 쓰던 프라이팬 코팅이 군데군데 벗겨진 게 눈에 들어와서 순간 현타 옴. 저거 새로 사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냥 넘어감. 어차피 오늘은 프라이팬 쓸 일도 없었고.

그릇 하나에 다 넣고 전자레인지에 맡김

과정 자체는 손이 많이 안 감. 소세지랑 버섯 대충 썰어놓고, 뜨거운 물에 스프 풀어서 면 넣는 순서까지는 라면 끓이는 거랑 별 차이 없음. 다른 점은 냄비 대신 전자레인지용 그릇을 쓴다는 거임.

랩 씌우고 처음 돌릴 때가 좀 신기했음. 면이 익어가면서 랩이 볼록하게 부풀어 오르는 걸 보는데 저러다 터지는 거 아닌가 싶어서 옆에서 계속 지켜봄. 다행히 별일은 없었고 꺼내서 랩 살짝 벗기니까 김이 확 올라옴.

여기서 달걀 넣는 타이밍이 좀 애매함. 노른자를 젓가락으로 살짝 터뜨려야 하는데 이걸 얼마나 세게 눌러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힘. 첫판엔 너무 세게 눌러서 노른자가 다 퍼져버림. 반숙 느낌 살리고 싶으면 이 타이밍이랑 두 번째 가열 시간이 진짜 중요한데, 그 부분은 눈대중으로 하면 백프로 망함. 정확한 가열 타이밍 보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게 훨씬 나음.

치즈 올리고 마지막에 몇 초 더 돌리는 것도 은근 취향 타는 구간임. 너무 오래 돌리면 치즈가 흘러내려서 그릇 바닥에 눌어붙고, 덜 돌리면 딱딱한 채로 얹혀 있어서 애매함. 이날은 대충 감으로 돌렸다가 살짝 눌어붙어서 나중에 그릇 닦는데 좀 애먹음.

쪽파는 마지막에 뿌리기만 하면 끝이라 딱히 어려울 게 없음. 근데 쪽파 향이 뜨거운 국물 위에서 확 올라오는 순간은 매번 좋음.

전자레인지 문 앞에 쪼그려 앉아서 안에서 그릇 도는 거 멍하니 보고 있었음. 딱히 할 일도 없고 다른 데 신경 쓸 여력도 없어서 걍 그거 보면서 시간 때움. 다 돌아가고 그릇 꺼낼 때 랩에서 올라오는 김에 손 델 뻔한 것도 한 번 있었음. 다음엔 장갑 미리 챙겨놔야겠다 싶었음.

맛은 나쁘지 않은데 아쉬운 구석도 있음

결론부터 말하면 존맛까진 아니고 그냥저냥 만족스러운 정도임. 면발은 전자레인지로 익혔는데도 냄비 끓인 것과 큰 차이 없었고, 노른자 반숙 상태로 터뜨려서 국물에 섞이니까 국물이 좀 더 걸쭉해지는 느낌이 있었음. 치즈는 예상대로 짭짤한 맛을 더해줘서 나쁘지 않았음.

먹으면서 문득 이 한 그릇에 영양성분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져서 찾아봄.

1인분 기준 영양성분 · 가격 (1인분 레시피, recipio 계산)
칼로리1153 kcal
탄수화물112.1 g
단백질42.4 g
지방60.7 g
당류8.9 g
나트륨4357 mg
재료비약 4,134원 (1인분 전체)
사 먹으면약 12,600원

찾아보고 나니 생각보다 단백질 수치가 괜찮게 나와서 조금 놀람. 헬스 하는 입장에서 라면은 죄책감 드는 메뉴인데 소세지랑 달걀 덕분에 단백질이 어느 정도 받쳐주는 듯. 다만 나트륨 쪽은 그냥 예상한 대로였음.

아쉬운 점을 굳이 꼽자면 재료값임. 소세지, 버섯, 치즈, 쪽파까지 다 낱개로 사려면 은근 돈이 나감. 냉장고에 남아있던 재료로 만들 땐 체감이 안 됐는데, 만약 이거 하나 해먹으려고 재료를 처음부터 다 사야 한다면 차라리 그냥 편의점 라면 사 먹는 게 쌀 수도 있겠다 싶었음. 특히 슬라이스 치즈랑 새송이버섯은 한 번 사면 남는 양이 애매해서 나머지를 또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이 생김.

설거지는 확실히 줄었음. 그릇 하나에 젓가락 하나로 끝나니까 이 부분은 만족스러움. 냄비 안 쓴 것치고는 국물 맛도 크게 밀리는 느낌 없었고, 반숙 노른자 터뜨려서 섞어 먹는 마지막 몇 입이 제일 나았음. 다음에 또 해먹을진 모르겠는데 냉장고에 재료 남는 날엔 또 생각날 것 같긴 함.


배수구 사건으로 시작한 저녁이 라면 한 그릇으로 끝남. 다음엔 프라이팬부터 좀 바꿔야 할 듯.